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피로 애그뉴 (문단 편집) === 청년기 ===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아버지를 둔 이민 2세대이다. 그리스에서 올리브 농부였던 애그뉴의 아버지는 19세기 말 미국으로 이민을 와 밑바닥부터 올라가 성공한 식당을 연 [[아메리칸 드림]]의 모범적인 예시였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으로 아버지의 레스토랑이 파산했고 애그뉴 가족도 도산해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했다. 이 때문에 애그뉴는 청소년기에 학교를 마치자마자 전단지 돌리기를 비롯해 온갖 일을 다해 집안 가세를 일으켜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벌지 전투]]에 참여하며 죽을 위기도 넘겼고, 야간 수업을 받으면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이런 거친 성장 배경 때문에 애그뉴가 극단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1947년, 마침내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허리를 펴게 된다. 동시에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아버지는 평생 민주당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애그뉴 역시 민주당에 입당하려 했다. 법률회사 동료의 조언에 따라 공화당에 입당하는게 정치 생활을 하는게 좋아도 생각해 공화당에 입당했을 뿐 정치적 성향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1956년 [[볼티모어]] 카운티 의회 출마를 준비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2년,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에 출마했다. 볼티모어 카운티는 1895년부터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때 맞춰 민권법과 관련해 민주당이 분열되며 애그뉴는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킨다. 행정관으로서 온건한 진보 정책을 추진하여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배리 골드워터]] 지지 거부 운동에 동참하는 등[* [[윌리엄 스크랜턴]]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다만, 골드워터가 전당대회 표결에서도 승리하자 본선에서는 마지못해 골드워터를 지지하긴 했다.] 명확한 [[록펠러 공화당]] 성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흑인 민권운동의 영향으로 볼티모어 시내에서 과격 시위가 잦아지자, 법과 질서를 부르짖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진보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도시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시위대가 존재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어릴때부터 막노동을 하며 거칠어진 수사를 이용해 흑인과 신좌파 시위대를 마구 비난해 자신의 정치 성향과 별개로 "법과 질서"의 정치가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